Wednesday, June 15, 2011

인간성을 억압하는 규격화된 원룸

유학 시절부터 시작된 나의 집보기. 서울을 포함하여 3개국 3개 도시의 집을 보러 돌아다닌 경험이 있는데 이번처럼 특이한 집보기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번 집보기 경험을 요약하자면 사람이 사는 집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트에서 공산품을 사러 다닌 느낌이었다.

학교 근처에서 자취할 셋집을 구하러 하루 동안 스무군데 정도의 집을 봤는데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모든 원룸의 내부가 똑같았다. 마치 아파트 한 동에서 똑같은 평형대의 집만 층별로 보고 온 느낌이랄까...집 외관과 바깥 환경은 그런대로 기억이 나는데 집 내부로 기억하자면 어떤 집이 어떤 집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형적 원룸주택은 4~6층 정도의 다세대 주택 또는 빌딩 전체가 원룸으로 꾸며져 있고 한 층에 많은 방이 있기 때문에 창을 낼 수 없는 복도는 어둡다. 어두운 복도의 많은 철문 중 하나를 열고 들어가면 들어서자마자 측면으로 부엌이라고 할 수 있는 시설이 나온다. 부엌은 대개 세탁기, 작은 싱크대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스레인지는 세탁기 위에 놓을 공간이 없어서 단구 전기곤로가 놓여있거나 시설이 좋은 곳은 고급 붙박이 전기곤로가 설치되어 있는 곳도 있다. 공간이 좁기 때문에 세탁기는 현관의 신발벗는 곳을 향한 곳이 대부분이어서 빨래 꺼낼때 조심하지 않으면 빨래가 신발에 떨어지게 되어 있다. 예전에 지은 원룸주택이거나 방이 매우 좁은 경우 공동세탁기를 쓰게 되어 있는 곳도 종종 있다. 전자레인지는 옵션으로 갖추어진 곳이 없었으며 전자레인지나 전자밥솥을 세입자가 사 간다고 해도 부엌에 놓을 공간이 없어 방에 놓아두어야 한다. 대부분 부엌시설은 방의 일부이며, 간혹 부엌과 방 사이 칸막이나 미닫이문이 설치된 곳도 있는데 방과 부엌의 구분은 장점(가격상승요인)으로 작용한다.

방은 생활에 필요한 가구가 갖추어져 있는데 책상, 옷장, 에어컨은 반드시 구비되어 있고, 침대는 구비된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다. 대개 책상, 옷장, 침대를 놓으면 가구 사이를 돌아다닐 정도의 공간 밖에 없고, 침대 놓을 곳이 없어서 남은 공간에 이불을 깔아놓으면 방이 꽉 차는 곳도 있었다. 욕실의 경우 신/구원룸을 가리지 않고 철저하게 동일한 형태로 꾸며져 있는데 한쪽에 변기, 그옆에 세면대만 있고 샤워는 세면대에 달린 샤워꼭지 외에는 별다른 시설이 없어서 남은 공간에서 알아서하게 되어 있다.

일광은 향이나 건물 내에서 방의 위치에 따라 다른데 방이 작으므로 창문도 크지 않아 어두운 곳이 많고, 원룸 건물끼리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경우 시선차단가리개가 설치되어 답답함을 더하는 곳도 있다.

사진을 찍어놓지 못해 아쉽지만, 나같은 경우 이렇게 비좁고 침침한 곳에서 한 달만 살아도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 지방에서 올라와서 원룸에 자취를 하던 직장 동료가 책상에 앉으면 사방의 벽에 팔이 닿는다며 더 넓은 곳으로 이사가고 싶다고 했을 때의 '좁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는데 직접 보고 나서야 그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원룸촌의 가장 큰 문제는 세입자에게 전혀 집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곳에서 집을 보건 간에 예산이 작더라도 정해진 예산 내에서 다양한 주택 형태를 보고 나에게 최대한 어울리는 집을 고를 수 있었는데 이곳 원룸촌에는 똑같은 형식의 원룸이 가격대별로 정확하게 서열화되어 있다.

비교를 하자면, 현재 살고 있는 재개발 예정지 주택가에서 셋집을 찾을 때는 비록 작은 예산이었지만 중/대형 다세대주택 내 원룸, 초소형 다세대주택의 층별 독채형 원룸, 계단을 많이 올라가고 반지하인 대신 단독주택 내 방2개를 사용할 수 있는 곳, 상가주택의 자투리방 등 다양한 형태의 방이 나와있어서 집을 보러 다니는 재미가 있었고 내 필요에 가장 맞는 곳을 선택할 수 있었다.

반면 어제 본 대학가 원룸촌에는 주택가 대부분이 원룸주택으로 가득차있고 원룸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재개발 예정지의 경우 계단을 많이 올라갈수록 방값이 싸지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곳은 상당한 고저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형과 위치에는 별로 영향을 받지 않고 가옥 상태와 방의 시설에 의해 거의 가격이 결정된다. 반지하의 경우 전세3500만원 내외에 가격이 형성되어 있고, 지상은 4500만원 이상이고 방이 넓고 새집일수록 가격은 올라간다. 따라서 전세5000만원과 5500만원 사이에 상당한 넓이차가 존재하고 위에 기술한 답답한 방구조는 5000만원 이하의 방에 적용된다. 5500만원 이상의 경우 정신이상 걱정을 하지 않고 살 정도의 넓이는 되어서 5500만원이 이 동네에서의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최소의 전세보증금 선이며 월세에 밀려 점점 줄어드는 전세 물건을 생각하면 이 선은 매년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조건에 따른 가격이 매우 정확하게 정해져 있어 싼 방의 경우 반드시 결점이 있다. 밝은 지상 남향방인데 4500만원이라고 하면 방의 면적이 특히 좁고, 세탁은 공동세탁을 이용해야 하는 식이다.

이러한 독특한 주택시장 상황 때문에 하루만에 방보기를 끝내고 계약할 집을 고를 수 있었다. 위의 원룸 공식에 맞지 않는 좀 오래되고(15년 밖에 안되었지만 이동네 원룸주택으로는 노년에 속한다.) 4층을 올라다녀야하지만 밝고 넓은 방이 하나 있었고 남한테 뺏길까봐 오늘 아침에 부랴부랴 계약을 해버렸다. 며칠 더 투자하면 더 좋은 물건을 볼 가능성은 항상 존재하지만, 20개의 방 중 19개의 방이 거의 엇비슷했고 벌써 다른 부동산중개소에서 똑같은 방을 두 번 보았기 때문에 더 보았자 내 다리만 아플 것이라고 판단을 한 것이다.

과밀 도시, 극단적 주택의 상업화와 규격화 그리고 신음하는 인간. 일상에서 거창한 키워드들을 두루 경험한 날이었다.      

2 comments:

  1. 희석씨가 이런 경험을 했었군요. 이 경험에 대해 더 자세하게 듣고 싶은데 언제 밥 같이 먹으면서 얘기해줘요. 원룸주택과 인권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생각이 필요한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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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오랜만에 제 블로그에 접속해서 이제야 댓글을 보았습니다. ^^ 사실은 원룸주택보다 더 열악한 곳이 고시원과 쪽방인데 세 가지 주택 다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지 못하지만, 없앤다고 나설 경우 저소득층이 살 곳이 없어지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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